[NFN전국축제뉴스 유명진 기자]
천년고찰_대흥사(大興寺)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서산대사

서산대사는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숭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되어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랐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지리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어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이유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를 붙인 「선가귀감」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 「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 「운수단」, 시문을 모아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그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 때 구국의 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산대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불교는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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